종잡을 수 없고 불가사의한 세대 상의 번역과 실천 (2023) - 김선영(뮤지엄한미 학예연구관)
삼인칭의 남자들 (2023) - 윤규홍(예술사회학)
일그러진 ‘20대 남자’의 초상 (2021) - 김소희(Curator’s Atelier 49 디렉터)
《Wandering, Wondering》 : ‘묶음’을 풀기, ‘한눈’에 읽기를 포기하기 (2020) - 김맑음(독립큐레이터)
수집, 분류, 압축을 통한 한 세대의 초상
송석우의 <Wandering, Wondering>(2020~ )은 대한민국의 20, 30대 청년이라는 범주 안에서 ‘사회로의 진입’,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 ‘부조리한 시스템’, ‘방황’, ‘고독’, ‘무기력’과 같은 키워드로 도출할 수 있는 개개인의 의식과 감정, 경험의 데이터를 시각언어로 압축 구성한 작업이다. 동년배 집합이 포괄한 수백 개의 자료점(data point)을 작가가 선택, 수집하고 분류해 그 세대에 관한 시의적이고 시각적인 정보(information)로 재구성한다.1 물리적 나이로 묶인 개별 개체의 모둠이 사회를 처음 경험하며 느끼는 ‘종잡을 수 없고(wandering) 불가사의한(wondering)’ 집단 심성이란 여과기를 통해 사회적 범주로 번역되는 셈이다. 작가는 청년 세대의 사회 경험을 최대한 포괄하고 공감하려는 듯, 자신이 속한 이 범주를 삼인칭화하고 자료점이 될 만한 여러 인물의 동정을 살핀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점들의 교집합은 이제 막 사회와 관계 맺기 시작한 20, 30대 청년의 복잡미묘한 자화상으로 사진 속에 구현된다.
송석우가 이 데이터의 교집합을 시각언어로 구체화하는 과정은 크게 몸짓언어, 장소, 카메라 워크2로 요약할 수 있다. 드러내고자 하는 청년 세대의 집단 심성은 도심 또는 자연 속에서 (때로는 특정 오브제를 가지고) 어떤 몸짓을 취한 젊은 남성들의 모둠으로 드러난다. 장소와 그곳을 점한 인물의 정지된 몸짓은 기묘하게 어울리거나 대치하며 어떤 의미를 만든다. 시각언어가 발화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장소와 인물의 몸짓이 가장 조화롭게3 화면을 채우도록 작가는 적절한 위치에 카메라를 놓고, 각도, 초점 거리와 조리개값을 설정한다. 피사체와 20m 내지 25m 거리를 두고, 135mm 광각렌즈로 심도 깊게 촬영한 사진들은 인물의 구체적 생김새나 개개인의 차이보다 일괄된 몸짓과 덩어리감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는 장소의 방대한 공간감에 시선을 먼저 두게 한다. 개개인의 정황보다 이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집단의 몸짓, 즉 육중하고 일률적인 사회 시스템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집단의 모습에 더 치중한 작가의 거시적 관점이 화면 속에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이 모습은 마치 우주를 형성한 천체를 망원경으로 멀리서 잡아내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증폭과 번역을 위한 형식
사사로운 것들을 모아 크고 두드러진 것으로 시각화 하는 작업은 개개인의 유영하는 몸짓4을 한 세대의 초상으로, 즉 흩어져 희미하던 것을 뚜렷한 의미체로 언어화 하는 과정이다. 그 부단한 번역과 증폭의 과정에서 한 가지 드는 의문점은 작업이 개진될수록 서서히 견고해지는 사진의 형식이다. 사소하고 모호하던 것이 확고한 의미를 갖는 언어로 탈화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규칙과 형식을 적용하기 나름인데, 송석우의 사진 속에는 ‘획일적인’ 몸짓을 취하고 장소 곳곳을 ‘점처럼’ 점한 ‘얼굴 없는’ 인물들이 일관되게 등장한다. 작가의 말 대로 이들은 작업에서 중요한 “사진적인 장치”5이자 형식인 셈이다.
홀로 혹은 맞대어 서 있거나 부둥켜안은 인물들은 화면 안에서 얼굴을 가리고 일관된 몸짓을 취한다. 적게는 두 명에서, 많게는 여덟, 아홉 명씩 모둠으로 같은 자세를 취한 이들은 역동적이기보다 계산된 원리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처럼 보인다. 마치 거대한 구조에 꼭 끼워 맞춘 기계 모듈처럼 자연이나 도심 곳곳에 서 있다. 한편, 장소의 방대한 공간감은 인물집단을 더욱 작고 무력한 대상으로 표현한다. 사각 프레임 너머까지 펼쳐질 듯 선명하고 광대한, 깊은 심도의 배경은 그 속에 점 찍힌 인물을 무겁게 짓누른다. 인물들은 배경의 일부로 포섭당하는 한편 기이한 몸짓으로 그 무게에 반응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렇게 사진 속 장소는 인물을 누르는 둔중한 사회 구조로 읽힐 수 있다. 같은 복장에 같은 몸짓을 취한 이들은 이미 상당 부분 획일사회에 익숙해진 모습을 은유하는 한편, 이 공고한 성공 사회 시스템 안에서 순응과 저항을 반복하며 힘겹게 버티는 이들의 애처로운 세대 상이다.
이처럼 ‘육중한 사회 속에 처한 불완전한 청년 세대’라는 관계구도는 일종의 공식처럼 송석우의 사진에 적용되는 시각구조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듯 광대하게 펼쳐진 배경과 곳곳에 얼굴을 가리고 작게 위치한 인물이 그 관계구도를 지시하는 시각적 공식이다. 여기서 필자가 가진 질문은 그와 같이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구도가 작금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냄에도6 과연 청년 세대 특유의 ‘종잡을 수 없고 불가사의한’ 심상을 대변하는데 적절한가 라는 점이다. 사회 안에서 명확히 자신을 규정하기 전 ‘경계’에서 발현되는, 어떤 틈새에 있는 심상을 언어화 함에 있어 이처럼 통상적이고 정형화된 틀이 얼마나 유효할까?
수행적 가치에서 얻을 수 있는 대안
이처럼 사진 속 정형화된 시각 공식에 관한 문제 제기는 결코 현시점의 작업을 품평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 공식에 변화를 제안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조금도 변함없는 거대한 구조와 그 속에 적응한 개체라는 수직적인 대립 쌍은 지속되어야 하는가? 그 개체들이 사회에 순응하는 한편 이의를 제기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양가적인 심상이 어떤 형식적 변화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몸짓언어를 통해 작가가 작업에 도입한 수행성(performativity)의 개념을 언급해 볼 수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의 요인과 특징을 염두에 두고 카메라 앞에서 어떤 포즈나 움직임을 취한다. 그 몸짓의 표현을 위해 인물들이 카메라 앞에 버티고 서서 할애하는 육체적 열량은 장소의 뉘앙스와 맥락을 전환하는 사진의 수행적 요소다. 카메라 앞에서 일어난 일종의 사건이라 해석할 수 있는 이 몸짓들은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 중에 청년들의 상태를, 종잡을 수 없고 불가사의한 심정으로 고군분투 중인 이들의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시각장치다. 근육의 수축과 이완이 반복되며 일어나는 수행적 행위에 주목할 때 우리는 이 청년들이 결코 그 자리에,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성년이 되었을 때 이들은 더 이상 장소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기보다는 움직이고 변화를 시도하며, 어느 순간 공간을 포섭하고 사회구조에 영향을 행사하는 더 적극적인 수행자가 될 것이다. 『수행성의 미학』을 집필한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는 1960년대 이후 연극을 비롯한 현대미술 속 퍼포먼스에 대해 논하며 작품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기존에 당연시되었던 이분법적 개념 쌍을 무효화하고, 그 대립성을 무너뜨린 것이라 했다. 물론 그가 언급하는 개념 쌍은 예술과 현실, 주체와 객체, 육체와 영혼, 동물과 사람과 같은 더 거시적인 개념들이지만7 충분히 송석우 사진이 이야기하는 사회(불변하는 구조)와 그 속에 구성원(적응하는 개체)이라는 대등하지 않은 대립 쌍에도 대입할 수 있다. 에리카는 그 경계, 문지방을 넘어 변환하는 사람의 존재가 수행적인 작업의 핵심이라 언급한다.
송석우의 작업에서 그 문지방은 어리숙한 청년들의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어느 순간 질문하고 저항하며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태도의 변화를 뜻한다. 이제 막 사회로 진입한 이들에게 한없이 견고하고 육중해 보이던 대상이 이들의 의지에 따라 유동하고 호흡할 수 있는 대상으로 관계성이 전격적으로 달라지는 경계인 것이다. 질문하고 저항하므로 그 문지방를 넘어설 수 있음을 염두에 둘 때 2030세대의 모호하고 무른 자화상은 결코 하나의 정형화된 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고 주저하면서도 움직이는 집단이다. 지금은 균열이 있고 어그러진 작은 초상이지만 그 안에서 변화를 실천하고 역치하는 수행성이 사진의 형식으로도 표출되기를 기대한다. 청년들이 서있는 사진 속에 광활한 공간은 더이상 이들이 적응하고 수긍해야 할 계획된 선로의 집합이 아니라 스스로 묻고 헤매며 길을 만들어 가야하는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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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연작에서 송석우가 의도한 것은 자신이 성인이 되며 겪는 일련의 경험과 심상을 대한민국에 사는 동년배 집단의 성장통이자 집단 심성으로 증폭하는 일이다. 자신의 심정이 작가가 고백하듯, “성인이 되어가면서 점점 시스템화 되어가고 사회화 되어가고 있는 20·30세대를 대변”(문화요 160회_0902 어느 사진가의 여정, 대구 MBC Program https://www.youtube.com/watch?v=Tuw04i13k3M) 하려면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개별 사례들을 모아야 했다. 그렇게 여러 개인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작가가 얻은 관계, 이들의 구체적인 사정은 작가가 전제한 집단 심성의 유효한 자료체가 된다. 이 자료체가 시각 이미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거나 공감을 호소하기보다 더 큰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사례 연구 중 하나로 기능한다. 한 세대를 설명하기 위해 자료체의 유효한 요소를 (다소 건조하게) 선택, 취합한다는 측면에서 필자는 작가의 작업 행위를 ‘데이터점’들을 모아 ‘정보’로 구성한다고 표현했다.
2 화면구성을 위해 촬영 기재, 렌즈, 조명 등 카메라를 조작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3 주관적인 표현인 ‘조화롭게’를 본문에서는 ‘장소의 공간감을 극대화하고, 인물은 그 속의 일부로 다른 환경적 요소와 배치되지 않게 나타낸’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4 2022년 4월에 신사옥에서 열린 송석우의 개인전 제목 ‘유영하는 몸짓들(Floating Motions)’을 참고했다.
5 문화요 160회_0902 어느 사진가의 여정, 대구 MBC Program https://www.youtube.com/watch?v=Tuw04i13k3M
6 어쩌면 작가는 이를 통해 그 작고 무른 몸짓들도 결국은 상식과 합리를 앞세우는 사회 속에서 정형화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작업 형식에 영리하게 투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7 에리카 피셔-리히테 (김정숙 번역), 『수행성의 미학: 현대예술의 혁명적 전환과 새로운 퍼포먼스 미학』(서울: 문학과지성사), 2017, 374쪽.
송석우의 <Wandering, Wondering>(2020~ )은 대한민국의 20, 30대 청년이라는 범주 안에서 ‘사회로의 진입’,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 ‘부조리한 시스템’, ‘방황’, ‘고독’, ‘무기력’과 같은 키워드로 도출할 수 있는 개개인의 의식과 감정, 경험의 데이터를 시각언어로 압축 구성한 작업이다. 동년배 집합이 포괄한 수백 개의 자료점(data point)을 작가가 선택, 수집하고 분류해 그 세대에 관한 시의적이고 시각적인 정보(information)로 재구성한다.1 물리적 나이로 묶인 개별 개체의 모둠이 사회를 처음 경험하며 느끼는 ‘종잡을 수 없고(wandering) 불가사의한(wondering)’ 집단 심성이란 여과기를 통해 사회적 범주로 번역되는 셈이다. 작가는 청년 세대의 사회 경험을 최대한 포괄하고 공감하려는 듯, 자신이 속한 이 범주를 삼인칭화하고 자료점이 될 만한 여러 인물의 동정을 살핀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점들의 교집합은 이제 막 사회와 관계 맺기 시작한 20, 30대 청년의 복잡미묘한 자화상으로 사진 속에 구현된다.
송석우가 이 데이터의 교집합을 시각언어로 구체화하는 과정은 크게 몸짓언어, 장소, 카메라 워크2로 요약할 수 있다. 드러내고자 하는 청년 세대의 집단 심성은 도심 또는 자연 속에서 (때로는 특정 오브제를 가지고) 어떤 몸짓을 취한 젊은 남성들의 모둠으로 드러난다. 장소와 그곳을 점한 인물의 정지된 몸짓은 기묘하게 어울리거나 대치하며 어떤 의미를 만든다. 시각언어가 발화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장소와 인물의 몸짓이 가장 조화롭게3 화면을 채우도록 작가는 적절한 위치에 카메라를 놓고, 각도, 초점 거리와 조리개값을 설정한다. 피사체와 20m 내지 25m 거리를 두고, 135mm 광각렌즈로 심도 깊게 촬영한 사진들은 인물의 구체적 생김새나 개개인의 차이보다 일괄된 몸짓과 덩어리감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는 장소의 방대한 공간감에 시선을 먼저 두게 한다. 개개인의 정황보다 이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집단의 몸짓, 즉 육중하고 일률적인 사회 시스템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집단의 모습에 더 치중한 작가의 거시적 관점이 화면 속에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이 모습은 마치 우주를 형성한 천체를 망원경으로 멀리서 잡아내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증폭과 번역을 위한 형식
사사로운 것들을 모아 크고 두드러진 것으로 시각화 하는 작업은 개개인의 유영하는 몸짓4을 한 세대의 초상으로, 즉 흩어져 희미하던 것을 뚜렷한 의미체로 언어화 하는 과정이다. 그 부단한 번역과 증폭의 과정에서 한 가지 드는 의문점은 작업이 개진될수록 서서히 견고해지는 사진의 형식이다. 사소하고 모호하던 것이 확고한 의미를 갖는 언어로 탈화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규칙과 형식을 적용하기 나름인데, 송석우의 사진 속에는 ‘획일적인’ 몸짓을 취하고 장소 곳곳을 ‘점처럼’ 점한 ‘얼굴 없는’ 인물들이 일관되게 등장한다. 작가의 말 대로 이들은 작업에서 중요한 “사진적인 장치”5이자 형식인 셈이다.
홀로 혹은 맞대어 서 있거나 부둥켜안은 인물들은 화면 안에서 얼굴을 가리고 일관된 몸짓을 취한다. 적게는 두 명에서, 많게는 여덟, 아홉 명씩 모둠으로 같은 자세를 취한 이들은 역동적이기보다 계산된 원리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처럼 보인다. 마치 거대한 구조에 꼭 끼워 맞춘 기계 모듈처럼 자연이나 도심 곳곳에 서 있다. 한편, 장소의 방대한 공간감은 인물집단을 더욱 작고 무력한 대상으로 표현한다. 사각 프레임 너머까지 펼쳐질 듯 선명하고 광대한, 깊은 심도의 배경은 그 속에 점 찍힌 인물을 무겁게 짓누른다. 인물들은 배경의 일부로 포섭당하는 한편 기이한 몸짓으로 그 무게에 반응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렇게 사진 속 장소는 인물을 누르는 둔중한 사회 구조로 읽힐 수 있다. 같은 복장에 같은 몸짓을 취한 이들은 이미 상당 부분 획일사회에 익숙해진 모습을 은유하는 한편, 이 공고한 성공 사회 시스템 안에서 순응과 저항을 반복하며 힘겹게 버티는 이들의 애처로운 세대 상이다.
이처럼 ‘육중한 사회 속에 처한 불완전한 청년 세대’라는 관계구도는 일종의 공식처럼 송석우의 사진에 적용되는 시각구조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듯 광대하게 펼쳐진 배경과 곳곳에 얼굴을 가리고 작게 위치한 인물이 그 관계구도를 지시하는 시각적 공식이다. 여기서 필자가 가진 질문은 그와 같이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구도가 작금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냄에도6 과연 청년 세대 특유의 ‘종잡을 수 없고 불가사의한’ 심상을 대변하는데 적절한가 라는 점이다. 사회 안에서 명확히 자신을 규정하기 전 ‘경계’에서 발현되는, 어떤 틈새에 있는 심상을 언어화 함에 있어 이처럼 통상적이고 정형화된 틀이 얼마나 유효할까?
수행적 가치에서 얻을 수 있는 대안
이처럼 사진 속 정형화된 시각 공식에 관한 문제 제기는 결코 현시점의 작업을 품평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 공식에 변화를 제안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조금도 변함없는 거대한 구조와 그 속에 적응한 개체라는 수직적인 대립 쌍은 지속되어야 하는가? 그 개체들이 사회에 순응하는 한편 이의를 제기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양가적인 심상이 어떤 형식적 변화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몸짓언어를 통해 작가가 작업에 도입한 수행성(performativity)의 개념을 언급해 볼 수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의 요인과 특징을 염두에 두고 카메라 앞에서 어떤 포즈나 움직임을 취한다. 그 몸짓의 표현을 위해 인물들이 카메라 앞에 버티고 서서 할애하는 육체적 열량은 장소의 뉘앙스와 맥락을 전환하는 사진의 수행적 요소다. 카메라 앞에서 일어난 일종의 사건이라 해석할 수 있는 이 몸짓들은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 중에 청년들의 상태를, 종잡을 수 없고 불가사의한 심정으로 고군분투 중인 이들의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시각장치다. 근육의 수축과 이완이 반복되며 일어나는 수행적 행위에 주목할 때 우리는 이 청년들이 결코 그 자리에,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성년이 되었을 때 이들은 더 이상 장소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기보다는 움직이고 변화를 시도하며, 어느 순간 공간을 포섭하고 사회구조에 영향을 행사하는 더 적극적인 수행자가 될 것이다. 『수행성의 미학』을 집필한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는 1960년대 이후 연극을 비롯한 현대미술 속 퍼포먼스에 대해 논하며 작품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기존에 당연시되었던 이분법적 개념 쌍을 무효화하고, 그 대립성을 무너뜨린 것이라 했다. 물론 그가 언급하는 개념 쌍은 예술과 현실, 주체와 객체, 육체와 영혼, 동물과 사람과 같은 더 거시적인 개념들이지만7 충분히 송석우 사진이 이야기하는 사회(불변하는 구조)와 그 속에 구성원(적응하는 개체)이라는 대등하지 않은 대립 쌍에도 대입할 수 있다. 에리카는 그 경계, 문지방을 넘어 변환하는 사람의 존재가 수행적인 작업의 핵심이라 언급한다.
송석우의 작업에서 그 문지방은 어리숙한 청년들의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어느 순간 질문하고 저항하며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태도의 변화를 뜻한다. 이제 막 사회로 진입한 이들에게 한없이 견고하고 육중해 보이던 대상이 이들의 의지에 따라 유동하고 호흡할 수 있는 대상으로 관계성이 전격적으로 달라지는 경계인 것이다. 질문하고 저항하므로 그 문지방를 넘어설 수 있음을 염두에 둘 때 2030세대의 모호하고 무른 자화상은 결코 하나의 정형화된 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고 주저하면서도 움직이는 집단이다. 지금은 균열이 있고 어그러진 작은 초상이지만 그 안에서 변화를 실천하고 역치하는 수행성이 사진의 형식으로도 표출되기를 기대한다. 청년들이 서있는 사진 속에 광활한 공간은 더이상 이들이 적응하고 수긍해야 할 계획된 선로의 집합이 아니라 스스로 묻고 헤매며 길을 만들어 가야하는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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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연작에서 송석우가 의도한 것은 자신이 성인이 되며 겪는 일련의 경험과 심상을 대한민국에 사는 동년배 집단의 성장통이자 집단 심성으로 증폭하는 일이다. 자신의 심정이 작가가 고백하듯, “성인이 되어가면서 점점 시스템화 되어가고 사회화 되어가고 있는 20·30세대를 대변”(문화요 160회_0902 어느 사진가의 여정, 대구 MBC Program https://www.youtube.com/watch?v=Tuw04i13k3M) 하려면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개별 사례들을 모아야 했다. 그렇게 여러 개인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작가가 얻은 관계, 이들의 구체적인 사정은 작가가 전제한 집단 심성의 유효한 자료체가 된다. 이 자료체가 시각 이미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거나 공감을 호소하기보다 더 큰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사례 연구 중 하나로 기능한다. 한 세대를 설명하기 위해 자료체의 유효한 요소를 (다소 건조하게) 선택, 취합한다는 측면에서 필자는 작가의 작업 행위를 ‘데이터점’들을 모아 ‘정보’로 구성한다고 표현했다.
2 화면구성을 위해 촬영 기재, 렌즈, 조명 등 카메라를 조작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3 주관적인 표현인 ‘조화롭게’를 본문에서는 ‘장소의 공간감을 극대화하고, 인물은 그 속의 일부로 다른 환경적 요소와 배치되지 않게 나타낸’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4 2022년 4월에 신사옥에서 열린 송석우의 개인전 제목 ‘유영하는 몸짓들(Floating Motions)’을 참고했다.
5 문화요 160회_0902 어느 사진가의 여정, 대구 MBC Program https://www.youtube.com/watch?v=Tuw04i13k3M
6 어쩌면 작가는 이를 통해 그 작고 무른 몸짓들도 결국은 상식과 합리를 앞세우는 사회 속에서 정형화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작업 형식에 영리하게 투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7 에리카 피셔-리히테 (김정숙 번역), 『수행성의 미학: 현대예술의 혁명적 전환과 새로운 퍼포먼스 미학』(서울: 문학과지성사), 2017, 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