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양말을 갈아신는다 (2025) - 박지수(보스토크 매거진 편집장)
어긋나는 선 (2025) - 유운성(영화평론가)
종잡을 수 없고 불가사의한 세대 상의 번역과 실천 (2023) - 김선영(뮤지엄한미 학예연구관)
삼인칭의 남자들 (2023) - 윤규홍(예술사회학)
일그러진 ‘20대 남자’의 초상 (2021) - 김소희(독립큐레이터)
《Wandering, Wondering》 : ‘묶음’을 풀기, ‘한눈’에 읽기를 포기하기 (2020) - 김맑음(독립큐레이터)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양말을 갈아신는다. 장례식장에서 처 음 겪는 슬픔으로 경황없는 가운데에서도 무심코 신은 흰색 양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렇게 슬픈데 양말이 무슨 대수인가, 싶지만 그래도 결국 검은색 양말로 갈아신는다. 검은색 상복에 어울리도록, 장례에도 드레스 코드가 있으니 까.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지만 이를 그냥 마냥 무시하기는 어렵다.
만약 상주인 내가 검은색 옷을 입지 않는다면, 밝은색 옷을 입는다면, 나의 슬픔은 의심이나 오해를 사기 쉬울 것이다.
아예 장례식을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부고 소식을 듣고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 온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마음대로 편하게 옷을 입고 나올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몹시 슬픈데, 그저 옷차림 때문에 슬프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억울한 일도 없다. 옷차림이 입방아에 오른다면, 고인의 죽음을 기 리고 애도하는 장례의 의미마저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건 망자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닌가.
다른 이들에게 슬픔을 알리고, 다른 이들과 슬픔을 나누는 의례에서는 슬픔에도 드레스 코드가 있고, 형식과 규격이 있다. 그러니 검은색 옷을 꺼낸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양말을 갈아신는다. 하지만 드레스 코드는 단지 상황에 맞는 옷차림을 권장하는 것에서만 그치는 않는다. 드레스 코드에 맞는 행동과 말투, 매너와 역할이 요구되거나 강제되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으면 학생답게, 패스트푸드점 유니폼을 입으면 서비스 노동자답게, 상복을 입으면 상주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드레스 코드에 따라 남들이 보기에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감정의 매무새를 매만지게 된다.
그런데 어디 옷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나와 연결된 관계에 따라, 단체에 따라, 문화에 따라, 국가에 따라 개인에게 부과되는 코드들은 무수히 많다. 그렇기에 누구나 드레스 코드를 비롯해 수많은 규칙에 부합거나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구속하거나 소외시키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송석우의 작업 <노 드레스 코드 No Dress Code〉는 남들에게 코드를 강요받고, 또 남들에게 코드를 강요하는 우리의 일상을 환기한다. 드레스 코드를 알지 못해, 드레스 코드에 어긋나서, 드레스 코드에 맞게 처신하지 못해 느꼈던 크고 작은 열패감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동시에 그러한 '규칙의 틀'에서 벗어나는 상황, 즉 '노 드레스 코드'를 선언하는 이들의 몸짓을 천천히 보여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규칙에서 벗어나는 일은 규칙을 배우고 익히며 지키는 일보다 더 힘들고 고되다. 물론 규칙에 적응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만큼 규칙을 잘 따라 얻게 되는 달콤했던 성취감과 보상의 기억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코드를 따라 접속 되는 소속감은 안정되고 안온하기에, 이를 거부하는 일에는 불안감과 외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사진마다 미열과 통증, 몸살과 신음이 시각적으로 전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조용하고 서늘한 흔들림은 언제쯤 멈춰질까. 과연 그들의 몸짓은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까. 조마조마한 눈 길로 더 지켜볼 수밖에.
만약 상주인 내가 검은색 옷을 입지 않는다면, 밝은색 옷을 입는다면, 나의 슬픔은 의심이나 오해를 사기 쉬울 것이다.
아예 장례식을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부고 소식을 듣고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 온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마음대로 편하게 옷을 입고 나올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몹시 슬픈데, 그저 옷차림 때문에 슬프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억울한 일도 없다. 옷차림이 입방아에 오른다면, 고인의 죽음을 기 리고 애도하는 장례의 의미마저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건 망자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닌가.
다른 이들에게 슬픔을 알리고, 다른 이들과 슬픔을 나누는 의례에서는 슬픔에도 드레스 코드가 있고, 형식과 규격이 있다. 그러니 검은색 옷을 꺼낸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양말을 갈아신는다. 하지만 드레스 코드는 단지 상황에 맞는 옷차림을 권장하는 것에서만 그치는 않는다. 드레스 코드에 맞는 행동과 말투, 매너와 역할이 요구되거나 강제되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으면 학생답게, 패스트푸드점 유니폼을 입으면 서비스 노동자답게, 상복을 입으면 상주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드레스 코드에 따라 남들이 보기에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감정의 매무새를 매만지게 된다.
그런데 어디 옷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나와 연결된 관계에 따라, 단체에 따라, 문화에 따라, 국가에 따라 개인에게 부과되는 코드들은 무수히 많다. 그렇기에 누구나 드레스 코드를 비롯해 수많은 규칙에 부합거나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구속하거나 소외시키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송석우의 작업 <노 드레스 코드 No Dress Code〉는 남들에게 코드를 강요받고, 또 남들에게 코드를 강요하는 우리의 일상을 환기한다. 드레스 코드를 알지 못해, 드레스 코드에 어긋나서, 드레스 코드에 맞게 처신하지 못해 느꼈던 크고 작은 열패감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동시에 그러한 '규칙의 틀'에서 벗어나는 상황, 즉 '노 드레스 코드'를 선언하는 이들의 몸짓을 천천히 보여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규칙에서 벗어나는 일은 규칙을 배우고 익히며 지키는 일보다 더 힘들고 고되다. 물론 규칙에 적응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만큼 규칙을 잘 따라 얻게 되는 달콤했던 성취감과 보상의 기억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코드를 따라 접속 되는 소속감은 안정되고 안온하기에, 이를 거부하는 일에는 불안감과 외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사진마다 미열과 통증, 몸살과 신음이 시각적으로 전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조용하고 서늘한 흔들림은 언제쯤 멈춰질까. 과연 그들의 몸짓은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까. 조마조마한 눈 길로 더 지켜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