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나는 선 (2025) - 유운성(영화평론가)
종잡을 수 없고 불가사의한 세대 상의 번역과 실천 (2023) - 김선영(뮤지엄한미 학예연구관)
삼인칭의 남자들 (2023) - 윤규홍(예술사회학)
일그러진 ‘20대 남자’의 초상 (2021) - 김소희(Curator’s Atelier 49 디렉터)
《Wandering, Wondering》 : ‘묶음’을 풀기, ‘한눈’에 읽기를 포기하기 (2020) - 김맑음(독립큐레이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지만 화창한 느낌은 아니다. 하기야 화창한 날씨는 송석우의 사진과 어울리지 않을 것도 같다. 어쨌거나 이 사진 속 하늘은 파랗다. 그런데 쨍한 기운이라곤 도무지 없고 전면에 엷은 회색빛이 감돌고 있는 것 같은 하늘이다. 그런 하늘 아래로 아스팔트 공터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주차장인가 싶기도 하지만 주차 라인이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공터인 것 같다. (송석우는 이 사진을 드론 전용 비행장으로 조성된 광나루 비행장에서 촬영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런 정보는 사진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아니다.) 하늘과 공터가 맞닿은 경계에는 좌우로 숲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 사진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도장한 철제 바리케이드에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아스팔트 공터 위에 놓인 다섯 개의 바리케이드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똑같은 모습으로 늘어져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대략 남성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바지를 입고 사진 속 하늘빛을 닮은 셔츠를 걸치고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건 연출사진이로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무언가를 보여줌으로써 무언가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연출사진은 반드시 무언가를 말한다. 이를 현시와 표명의 차이라고 해도 좋겠다. 꼭 직접적으로 어떤 주제를 표명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연출사진에는 모종의 광경이 빚어내는 수수께끼나 환상, 혹은 감각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송석우의 연출사진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흥미로운 사진이 으레 그러하듯, 그의 연출사진은 단박에 들어오는 광경이 아니라 세부를 통해 말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다섯 개의 바리케이드는 왼쪽에 세 개, 그리고 오른쪽에 두 개가 놓여 있다. 여기서 굳이 비대칭의 구도를 끌어들인 것은 왜일까? 그러고 보니 좌우로 넓게 펼쳐진 숲 또한 왼쪽은 제법 큼직한 나무들로 무성해 보이지만 오른쪽으로는 관목들만 보인다. 사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왼편 바리케이드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과 오른편 바리케이드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하늘색 셔츠가 언뜻 보기엔 같아 보여도 실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왼편 사람들이 입은 셔츠는 짙은 바탕색 위에 연한 줄무늬가 있는 것이지만, 오른편 사람들이 입은 셔츠는 연한 바탕색 위에 짙은 줄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신고 있는 신발 또한 제각각이다. 마지막으로, 바닥의 아스팔트 위로 길게 그어진 두 개의 선도 기묘하기 짝이 없다. 이 중 하나는 아마도 잘못 그어진 것인 듯 덧칠해 지우려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쯤 되면 기분 좋게 혼란스러워진다. 작가에 의해 연출된 것(바리케이드와 셔츠)인지 상황에 의해 주어진 것(숲과 선)인지 분명히 판단하기 어려운 대상인 신발은 이 혼란에 매력을 더할 뿐이다. 가만히 보면 어긋나고 빗나가고 엇갈리는 것이 곳곳에 있다. 송석우의 연출사진이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을 통해서다. 따라서, ‘Wandering, Wondering’이라는 표제가 붙은 연작의 첫머리에 이 사진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송석우 스스로도 이 사진이 연작의 방향을 정립한 작품이라고 인정한다.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진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십 대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그의 말이다. 정작 이 사진은 그것보다 많은 것을, 그것과 다른 것을 말한다. 즉, 이 사진에는 현시와 표명 사이를 흐르는 야릇함이 있다. 그가 자신의 사진에 대칭적 구성을 끌어들인다면 이는 그것을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에 열어두기 위해서다. 연작 가운데 대칭적 구성이 가장 도드라지는 사진(#4, #10, #12, #23, #41 등) 가운데 무엇이든 찬찬히 들여다보라. 대칭적이라는 첫인상은 그러한 열림을 위한 구실일 뿐이었음을 누구든 알게 될 터다.
송석우가 사숙했다고 밝힌 사진가들은 박현두, 오상택, 사타, 드웨인 마이클즈, 그레고리 크루드슨 그리고 샌디 스코글런드처럼 퍼포먼스적 요소를 사진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작가들이다. 이 목록을 듣고 나서 송석우의 사진을 보며 부주의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말은 주의를 기울여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사타나 스코글런드의 환상성이 없다. 그의 사진은 아무리 연출된 것이라고는 해도 물리적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마이클즈나 크루드슨의 영화적 몽타주나 미장센이 없다. 그가 사진의 순수주의를 옹호하는 작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분명 그의 관심은 사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있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박현두나 오상택의 사진과는 달리 사회적 주제를 초과하거나 심지어 무화해 버리기까지 하는 초연함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했다는 그의 말은 작업의 출발점을 확인하는 단서일 수는 있어도 도착점을 가늠하는 지침일 수는 없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에 대한 송석우의 관심은 사실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하기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다시 강조하지만, 연출사진은 반드시 무언가를 말한다. 하지만 말하는 것이 꼭 통상 주제라고 부르는 것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송석우는 이 작가들의 작업에서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각양각색의 사진적 방식들을 본다. 물론 그런 이야기하기에 꼭 퍼포먼스적 요소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가령, 그가 고양시 소재 어느 개발제한구역의 숲을 배회하다 촬영한 <A Crowd within a Crowd>(2024) 같은 최근의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사진 속의 나무들에는 범람한 습지의 잔여물처럼 보이는 대상이 가지 곳곳에 걸려 있다. 이 사진의 기묘한 매력은 그렇게 보이는 대상이 자세히 보면 가지에 앉은 새들의 무리라는 (혹은, 사실은 그것도 아닐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이런 사진은 퍼포먼스적 요소의 도입 없이도 송석우가 그만의 사진적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송석우의 사진에서 공간과 대상이 맺는 ‘물리적 초현실’의 감각은 언젠가 우연한 발견에 이르기를 바라며 풍경 앞에서 기다리는 방식만으론 거의 포착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하여 퍼포먼스의 연출이 일종의 촉매로서 도입된다. 한밤중에 바닷가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복장으로 봐서는 여성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확신할 수는 없는) 사람을 포착한 <Barren Gaze>(2024)를 보자. 새벽녘의 바위 위에 서서 수평선 부근의 섬을 바라보고 있는 세 인물을 포착한 오상택의 <섬>과 이 사진을 같이 두고 바라보자. 인물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제법 격식을 갖춘 복장으로 똑같이 맞춰 입은 오상택의 모델들 대신 송석우는 캐주얼한 옷차림의 모델(그런데 정말 모델일까?) 하나만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 앞에서 넘실대는 파도 저편의 풍경은 온통 암흑이라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 결과, 연출의 지표들이 뚜렷이 나타나는 오상택의 사진과 달리 송석우의 사진은 연출과 발견 사이에서 흔들리는 불확정적인 것이 된다. 인물의 앞쪽에서 환하게 빛나는 비현실적인 조명도 이 불확정성을 없애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어느새 우리는 송석우가 염두에 둔 사회적 주제에서는 훌쩍 멀리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탈은 그의 사진 자체가 촉발하는 것이다. “공간 안에서 대상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사진들”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은 결국 배치와 구성이라는 연출적 조작이 발견의 행위와 만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선이 교차하는 곳을 우리는 사진적 (초)현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사진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도장한 철제 바리케이드에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아스팔트 공터 위에 놓인 다섯 개의 바리케이드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똑같은 모습으로 늘어져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대략 남성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바지를 입고 사진 속 하늘빛을 닮은 셔츠를 걸치고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건 연출사진이로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무언가를 보여줌으로써 무언가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연출사진은 반드시 무언가를 말한다. 이를 현시와 표명의 차이라고 해도 좋겠다. 꼭 직접적으로 어떤 주제를 표명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연출사진에는 모종의 광경이 빚어내는 수수께끼나 환상, 혹은 감각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송석우의 연출사진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흥미로운 사진이 으레 그러하듯, 그의 연출사진은 단박에 들어오는 광경이 아니라 세부를 통해 말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다섯 개의 바리케이드는 왼쪽에 세 개, 그리고 오른쪽에 두 개가 놓여 있다. 여기서 굳이 비대칭의 구도를 끌어들인 것은 왜일까? 그러고 보니 좌우로 넓게 펼쳐진 숲 또한 왼쪽은 제법 큼직한 나무들로 무성해 보이지만 오른쪽으로는 관목들만 보인다. 사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왼편 바리케이드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과 오른편 바리케이드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하늘색 셔츠가 언뜻 보기엔 같아 보여도 실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왼편 사람들이 입은 셔츠는 짙은 바탕색 위에 연한 줄무늬가 있는 것이지만, 오른편 사람들이 입은 셔츠는 연한 바탕색 위에 짙은 줄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신고 있는 신발 또한 제각각이다. 마지막으로, 바닥의 아스팔트 위로 길게 그어진 두 개의 선도 기묘하기 짝이 없다. 이 중 하나는 아마도 잘못 그어진 것인 듯 덧칠해 지우려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쯤 되면 기분 좋게 혼란스러워진다. 작가에 의해 연출된 것(바리케이드와 셔츠)인지 상황에 의해 주어진 것(숲과 선)인지 분명히 판단하기 어려운 대상인 신발은 이 혼란에 매력을 더할 뿐이다. 가만히 보면 어긋나고 빗나가고 엇갈리는 것이 곳곳에 있다. 송석우의 연출사진이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을 통해서다. 따라서, ‘Wandering, Wondering’이라는 표제가 붙은 연작의 첫머리에 이 사진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송석우 스스로도 이 사진이 연작의 방향을 정립한 작품이라고 인정한다.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진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십 대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그의 말이다. 정작 이 사진은 그것보다 많은 것을, 그것과 다른 것을 말한다. 즉, 이 사진에는 현시와 표명 사이를 흐르는 야릇함이 있다. 그가 자신의 사진에 대칭적 구성을 끌어들인다면 이는 그것을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에 열어두기 위해서다. 연작 가운데 대칭적 구성이 가장 도드라지는 사진(#4, #10, #12, #23, #41 등) 가운데 무엇이든 찬찬히 들여다보라. 대칭적이라는 첫인상은 그러한 열림을 위한 구실일 뿐이었음을 누구든 알게 될 터다.
송석우가 사숙했다고 밝힌 사진가들은 박현두, 오상택, 사타, 드웨인 마이클즈, 그레고리 크루드슨 그리고 샌디 스코글런드처럼 퍼포먼스적 요소를 사진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작가들이다. 이 목록을 듣고 나서 송석우의 사진을 보며 부주의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말은 주의를 기울여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사타나 스코글런드의 환상성이 없다. 그의 사진은 아무리 연출된 것이라고는 해도 물리적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마이클즈나 크루드슨의 영화적 몽타주나 미장센이 없다. 그가 사진의 순수주의를 옹호하는 작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분명 그의 관심은 사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있다. 송석우의 사진에는 박현두나 오상택의 사진과는 달리 사회적 주제를 초과하거나 심지어 무화해 버리기까지 하는 초연함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했다는 그의 말은 작업의 출발점을 확인하는 단서일 수는 있어도 도착점을 가늠하는 지침일 수는 없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에 대한 송석우의 관심은 사실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하기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다시 강조하지만, 연출사진은 반드시 무언가를 말한다. 하지만 말하는 것이 꼭 통상 주제라고 부르는 것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송석우는 이 작가들의 작업에서 어긋남과 빗나감과 엇갈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각양각색의 사진적 방식들을 본다. 물론 그런 이야기하기에 꼭 퍼포먼스적 요소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가령, 그가 고양시 소재 어느 개발제한구역의 숲을 배회하다 촬영한 <A Crowd within a Crowd>(2024) 같은 최근의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사진 속의 나무들에는 범람한 습지의 잔여물처럼 보이는 대상이 가지 곳곳에 걸려 있다. 이 사진의 기묘한 매력은 그렇게 보이는 대상이 자세히 보면 가지에 앉은 새들의 무리라는 (혹은, 사실은 그것도 아닐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이런 사진은 퍼포먼스적 요소의 도입 없이도 송석우가 그만의 사진적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송석우의 사진에서 공간과 대상이 맺는 ‘물리적 초현실’의 감각은 언젠가 우연한 발견에 이르기를 바라며 풍경 앞에서 기다리는 방식만으론 거의 포착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하여 퍼포먼스의 연출이 일종의 촉매로서 도입된다. 한밤중에 바닷가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복장으로 봐서는 여성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확신할 수는 없는) 사람을 포착한 <Barren Gaze>(2024)를 보자. 새벽녘의 바위 위에 서서 수평선 부근의 섬을 바라보고 있는 세 인물을 포착한 오상택의 <섬>과 이 사진을 같이 두고 바라보자. 인물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제법 격식을 갖춘 복장으로 똑같이 맞춰 입은 오상택의 모델들 대신 송석우는 캐주얼한 옷차림의 모델(그런데 정말 모델일까?) 하나만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 앞에서 넘실대는 파도 저편의 풍경은 온통 암흑이라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 결과, 연출의 지표들이 뚜렷이 나타나는 오상택의 사진과 달리 송석우의 사진은 연출과 발견 사이에서 흔들리는 불확정적인 것이 된다. 인물의 앞쪽에서 환하게 빛나는 비현실적인 조명도 이 불확정성을 없애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어느새 우리는 송석우가 염두에 둔 사회적 주제에서는 훌쩍 멀리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탈은 그의 사진 자체가 촉발하는 것이다. “공간 안에서 대상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사진들”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은 결국 배치와 구성이라는 연출적 조작이 발견의 행위와 만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선이 교차하는 곳을 우리는 사진적 (초)현실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