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잡을 수 없고 불가사의한 세대 상의 번역과 실천 (2023) - 김선영(뮤지엄한미 학예연구관)
일그러진 ‘20대 남자’의 초상 (2021) - 김소희(Curator’s Atelier 49 디렉터)
《Wandering, Wondering》 : ‘묶음’을 풀기, ‘한눈’에 읽기를 포기하기 (2020) - 김맑음(독립큐레이터)
삼인칭의 남자들 (2023) - 윤규홍(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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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ering, Wondering》 : ‘묶음’을 풀기, ‘한눈’에 읽기를 포기하기 (2020) - 김맑음(독립큐레이터)
송석우는 넓은 장소를 세트장 삼아 연출 사진을 남기는 작가입니다. 작품 속에 사람이 꼭 들어갑니다. 사진은 인물을 화면 중심에 크게 잡기도 하지만, 어떨 땐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기 어려울 만큼 원경으로 찍은 작업도 있습니다. 모든 인물은 송석우 작가의 분신입니다. 작가가 자기감정을 사진 속 피사체에 분배한 다음, 그들에게 대신 이야기하도록 만든 설정입니다. 그래서 변형된 자화상으로 봐도 좋습니다. 그러나 작가 본인이 피사체가 된 적은 없으며, 인터넷 같은 작품 바깥 언로에 자기주장을 드러내는 일도 없습니다. 내성적이면서도 서늘한 예술가 태도입니다.
작업 이력의 중심에 연작 <Wandering, Wondering>이 있습니다. 작품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 특히 개인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 신경을 씁니다. 이 관계는 비언어적인 소통 수단으로 드러납니다. 제가 알기로, 작가의 본적은 광주 쪽이며, 학생 시절을 대구에서, 현재 활동은 서울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진과 미술을 경계 가르는 일에 의미가 사라진 시대지만, 여전히 이쪽저쪽 간에 높고 낮은 제도 문턱이 있습니다. 송석우 작가는 그런 허들을 쉼 없이 넘나듭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동년배 시각예술 작가 중에서 가장 앞선 줄에 서 있습니다. 올해의 청년작가 전시는 지난해 광주 신세계미술제의 데칼코마니 같습니다. 여기에 작년 부산국제사진제 포트폴리오 리뷰까지 보탠다면, 송석우 작가는 지역 거점도시들을 아우르는 전방위 활동의 승자가 된 셈입니다.
이쯤이면 탄탄대로를 달리는 젊은 예술가의 성공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술계의 속내를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공과 조명보다 더 숱한 좌절과 배제를 겪는 건 희소자원 앞에서 경합을 벌이는 예술가의 흔한 삶입니다. 여기서 작가가 존엄이나 자긍심을 지킨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송석우 작가는 매 순간 삐걱대는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 바라봅니다. 여기서 출발한 자기 성찰의 서사는 렌즈로 들여다보는 무대로 완성됩니다. 이 무대는 연극이나 무용과 달리 시간이 멈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공연기록 사진가가 무대 위 인물들의 동작을 정지 컷으로 남긴다면 가장 함축적인 상징과 구도를 집어넣으려고 애쓸 겁니다. 이 작업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송석우의 사진 예술은 특별한 의미를 매번 다른 상황으로 의례화하는 형식입니다.
발음이 겹치는 언어 유희를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원더링, 원더링(Wandering, Wondering) 연작은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커가며 사회 속에 끼워 맞춰진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 형성과 적응 속도가 사회 변동을 못 따라잡아 벌어지는 문화 지체를 작가는 느꼈을 거고요. 작가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손댄 작업은 <IDENTITY : 정체성의 사유>였습니다. 흑백 톤 위에 자의식의 갈등을 묘사한 성격은 다소 설익었으나, 지금의 문제의식의 전조를 보여 주었습니다. 비슷한 발음의 커플링을 처음 착안한 <History, Hysteria>는 천연색 촬영으로 바뀌었고, 특정한 시간대와 장소를 지시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 연작부터 색감은 중요해져서, 작가는 자연과 인공물에 감정의 상징체로써 색을 끼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Wandering, Wondering>.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전작들보다 좀 더 보편적인 시각으로 문제에 다가갔습니다.
작가가 연출하는 보편성은 작가 자신을 투영한 세대 내 발언으로 한 번 더 진화했습니다. 그 또래만이 느끼는 막막함이나 이질감이 있을 겁니다. 기성세대도 남 일이라 할 순 없을 겁니다. 한번은 거쳐 갔던, 또한 지금 다른 버전으로 되풀이되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친구들과 즐겨 갔던 놀이동산을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돈 벌러 간다면, 같은 장소가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어른이 됐다는 걸 실감하는 건 생경한 공간감과 대인관계로 인한 압박감을 받을 때입니다. 만약 송석우 작가의 작품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진다면, 제대로 본 겁니다.
사진에는 같은 옷을 입은 인물들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 회화가 생각나는 클론의 이미지는 말 없는 시위 같기도 합니다. 앞서 저는 작가가 스스로 밝힌 작업 성격이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 출발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송석우 사진은 인물들이 메시지를 격렬히 토해내는 상황이 빠져있습니다. 이게 예컨대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마틴 루서 킹의 역사적인 연설을 기록한 사진과 다른 점입니다. 하다못해 캐릭터들이 연단 위에 올라 있다든지, 깃발이나 확성기를 들고 있는 사진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진 속 상황은 무언의 퍼포먼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매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연출작입니다. 모든 작업이 같은 세계관 속에 있고, 일관된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낱낱 사진은 서로 다른 서사를 깔고 있습니다. 젊은 남자들이 바리케이드에 몸이 접힌 채 걸려있습니다. 다른 사진에서 그들은 도심의 후미진 공터에 정처 없이 서 있습니다. 어떨 땐 리처드 매더슨의 소설 주인공처럼 세상에 홀로 남은 남자의 디오라마를 보여 줍니다. 그런가 하면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서로 닿아있거나 무언가를 펼치기도 합니다.
이 퍼포먼스는 젊은 세대의 좌절과 희망을 상징합니다. 이들을 규정하는 인구통계학적 변수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십 대의 여리여리한 남자들이 주인공입니다. 반복해서 말하는데, 사진 속의 이들은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얼굴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면서, 동시에 기표로 쓰임새가 있는 장치입니다. 관객들이 현실 속 이십 대 남자의 가치관을 떠올린다면, 사진은 정치적인 레퍼런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좀 생뚱맞은 상황 연출은 인물들의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옆으로 새는 일 없이 정제된 퍼포먼스를 보여 줍니다. 만 명의 관객 중 한 명이라도 사진 속에 아는 얼굴을 발견한다면, 그에게는 이 사진 예술이 코미디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전문 무용수나 퍼포먼스 예술가 대신 일반인을 섭외한 것도 비용 문제보다 대한민국 이대남이라는 모집단에서 표집한 대표성을 살리기 위해 작가가 내린 결정입니다.
이 같은 인물 표현은 그의 작업 진행 과정 중에서 전반부에 끼입니다. 그가 작품을 완성하는 순서를 간략히 말해보면, 먼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큰 틀을 구상한다고 합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장소를 찾아다니는 일이 다음 차례입니다. 로케이션을 위한 의도적인 탐색도 하지만, 우연히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기도 한답니다. 작가 머릿속에 작품을 위한 방이 하나만 마련되어있진 않겠지요. 공간을 찾았다면 거기에 이야기를 실현할 구도와 색상의 스케치가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필요한 인물 섭외를 하고, 그들 지원자와 충분한 대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용인지 추정해보면요. 첫째, 프레임 속에서 각자 뭘 할 건지 깨닫고, 결과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덜 지루하고 덜 피곤하겠죠. 둘째로 촬영이 시스템 속에서 한낱 부속품처럼 끼워 맞춰진 처지를 재현하는 과정이며, 모델들을 소모품처럼 대하지 않을 거란 언약이기도 합니다. 대화는 셋째로 또래 집단에 관한 인터뷰가 되어 본 작업과 다음 작업의 아이디어를 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스튜디오가 아닌 바깥에서 벌어지는 작업인 만큼, 촬영은 영화적인 특성을 가집니다. 또 필름 카메라를 써서 정지된 상을 잡아내므로 후보정 작업이 들어갈 여지는 매우 좁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가 되는 현장 통제입니다. 근경이 아니라 대지 경관을 잡아야 하는 작업에서 작가가 인물들의 위치와 동작을 통제하기 위해선 사전 준비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화 조연출자가 엑스트라들 사이에서 현장 지시하듯, 모델들 가운데 그 역할을 맡은 스태프가 있을 겁니다. 텅 빈 도시를 보여 주는 사진은 사람 통제가 힘듭니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불청객은 후반 작업으로 솎아내어야 하겠죠. 이처럼 깨알 같은 설정이 들어간 탓에, 사진 인화는 관람자를 위하여 크게 뽑는 판본이 필요합니다. 모든 과정의 결합을 통해 그의 사진은 크게 세 가지 외적 요소를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로 로케이션 장소, 둘째로 대지미술로써 연출한 인스톨레이션, 셋째로 인물의 위치와 의상과 동작 지시입니다.
저는 송석우의 작업이 비평이나 해석과 별개로, 도록과 같은 형태의 작가 코멘터리가 있더라도 재미있을 거라 봅니다. 하나의 작품 배후에 놓인 육하원칙의 사실, 여기에 순간적인 그곳만의 공기는 사진 표현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송석우 작가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제4의 벽>이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벽은 깨트리는 행위를 전제한 존재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4의 벽은 창작물과 감상자 사이에 놓인 인식의 벽입니다. 어떤 서사물은 이 벽을 깨고 주인공이 독자에게 느닷없이 말을 거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지 디드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우디 앨런, 조 단테, 그리고 마블의 스탠 리 같은 작가들이 세워둔 제4의 벽 깨기는 사진에서 실현하기에 쉽지 않은 프로젝트입니다. 관람자는 사진 구도 안에서 벽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그게 벽이 부자연스러운 설정의 가상계와 원래부터 그럴듯하게 존재하는 실제계의 중첩이라고 봅니다. 사실을 찍었음에도 환상을 보는 인지가 관객의 전면 시야 180도 앞에 공개됩니다. 단수 높은 관객은 카메라 이면의 180도 반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합니다.
사진은 뒤편에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을 제쳐두고 렌즈 앞으로 초점을 맞춥니다. 그곳은 정제되고 단순하게 제시됩니다. 작가가 그곳을 사진 대신 말로 설명하려면, 삼인칭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건 이름과 얼굴 없이, 윤곽만 알 수 있는 대상화된 존재란 뜻입니다. 취업률과 실업률,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 정책 찬성과 반대 비율로 객관화된 사람들의 상태는 다양한 국면에서 드러나지 않은 성정을 품고 있습니다. 송석우 작가는 일인칭 시점에서 풀어놓을 개인사를 삼인칭의 사회적 사실로 포개어 놓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사회학 전공자인 제가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행위와 구조의 상호보완 관계, 세대갈등론, 개성의 말살과 그 반대 격인 예술가의 자아도취, 이 모든 이야기에 입을 떼는 게 그의 사진에서 가능합니다. 이 작업이 열띤 토론 주제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렇긴 해도 그런 불판은 우선 작품이 가진 비현실과 현실의 왕래가 실현한 아름다움부터 충분히 감상한 다음의 일이겠지요.
작업 이력의 중심에 연작 <Wandering, Wondering>이 있습니다. 작품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 특히 개인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 신경을 씁니다. 이 관계는 비언어적인 소통 수단으로 드러납니다. 제가 알기로, 작가의 본적은 광주 쪽이며, 학생 시절을 대구에서, 현재 활동은 서울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진과 미술을 경계 가르는 일에 의미가 사라진 시대지만, 여전히 이쪽저쪽 간에 높고 낮은 제도 문턱이 있습니다. 송석우 작가는 그런 허들을 쉼 없이 넘나듭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동년배 시각예술 작가 중에서 가장 앞선 줄에 서 있습니다. 올해의 청년작가 전시는 지난해 광주 신세계미술제의 데칼코마니 같습니다. 여기에 작년 부산국제사진제 포트폴리오 리뷰까지 보탠다면, 송석우 작가는 지역 거점도시들을 아우르는 전방위 활동의 승자가 된 셈입니다.
이쯤이면 탄탄대로를 달리는 젊은 예술가의 성공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술계의 속내를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공과 조명보다 더 숱한 좌절과 배제를 겪는 건 희소자원 앞에서 경합을 벌이는 예술가의 흔한 삶입니다. 여기서 작가가 존엄이나 자긍심을 지킨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송석우 작가는 매 순간 삐걱대는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 바라봅니다. 여기서 출발한 자기 성찰의 서사는 렌즈로 들여다보는 무대로 완성됩니다. 이 무대는 연극이나 무용과 달리 시간이 멈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공연기록 사진가가 무대 위 인물들의 동작을 정지 컷으로 남긴다면 가장 함축적인 상징과 구도를 집어넣으려고 애쓸 겁니다. 이 작업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송석우의 사진 예술은 특별한 의미를 매번 다른 상황으로 의례화하는 형식입니다.
발음이 겹치는 언어 유희를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원더링, 원더링(Wandering, Wondering) 연작은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커가며 사회 속에 끼워 맞춰진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 형성과 적응 속도가 사회 변동을 못 따라잡아 벌어지는 문화 지체를 작가는 느꼈을 거고요. 작가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손댄 작업은 <IDENTITY : 정체성의 사유>였습니다. 흑백 톤 위에 자의식의 갈등을 묘사한 성격은 다소 설익었으나, 지금의 문제의식의 전조를 보여 주었습니다. 비슷한 발음의 커플링을 처음 착안한 <History, Hysteria>는 천연색 촬영으로 바뀌었고, 특정한 시간대와 장소를 지시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 연작부터 색감은 중요해져서, 작가는 자연과 인공물에 감정의 상징체로써 색을 끼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Wandering, Wondering>.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전작들보다 좀 더 보편적인 시각으로 문제에 다가갔습니다.
작가가 연출하는 보편성은 작가 자신을 투영한 세대 내 발언으로 한 번 더 진화했습니다. 그 또래만이 느끼는 막막함이나 이질감이 있을 겁니다. 기성세대도 남 일이라 할 순 없을 겁니다. 한번은 거쳐 갔던, 또한 지금 다른 버전으로 되풀이되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친구들과 즐겨 갔던 놀이동산을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돈 벌러 간다면, 같은 장소가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어른이 됐다는 걸 실감하는 건 생경한 공간감과 대인관계로 인한 압박감을 받을 때입니다. 만약 송석우 작가의 작품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진다면, 제대로 본 겁니다.
사진에는 같은 옷을 입은 인물들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 회화가 생각나는 클론의 이미지는 말 없는 시위 같기도 합니다. 앞서 저는 작가가 스스로 밝힌 작업 성격이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 출발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송석우 사진은 인물들이 메시지를 격렬히 토해내는 상황이 빠져있습니다. 이게 예컨대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마틴 루서 킹의 역사적인 연설을 기록한 사진과 다른 점입니다. 하다못해 캐릭터들이 연단 위에 올라 있다든지, 깃발이나 확성기를 들고 있는 사진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진 속 상황은 무언의 퍼포먼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매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연출작입니다. 모든 작업이 같은 세계관 속에 있고, 일관된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낱낱 사진은 서로 다른 서사를 깔고 있습니다. 젊은 남자들이 바리케이드에 몸이 접힌 채 걸려있습니다. 다른 사진에서 그들은 도심의 후미진 공터에 정처 없이 서 있습니다. 어떨 땐 리처드 매더슨의 소설 주인공처럼 세상에 홀로 남은 남자의 디오라마를 보여 줍니다. 그런가 하면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서로 닿아있거나 무언가를 펼치기도 합니다.
이 퍼포먼스는 젊은 세대의 좌절과 희망을 상징합니다. 이들을 규정하는 인구통계학적 변수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십 대의 여리여리한 남자들이 주인공입니다. 반복해서 말하는데, 사진 속의 이들은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얼굴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면서, 동시에 기표로 쓰임새가 있는 장치입니다. 관객들이 현실 속 이십 대 남자의 가치관을 떠올린다면, 사진은 정치적인 레퍼런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좀 생뚱맞은 상황 연출은 인물들의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옆으로 새는 일 없이 정제된 퍼포먼스를 보여 줍니다. 만 명의 관객 중 한 명이라도 사진 속에 아는 얼굴을 발견한다면, 그에게는 이 사진 예술이 코미디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전문 무용수나 퍼포먼스 예술가 대신 일반인을 섭외한 것도 비용 문제보다 대한민국 이대남이라는 모집단에서 표집한 대표성을 살리기 위해 작가가 내린 결정입니다.
이 같은 인물 표현은 그의 작업 진행 과정 중에서 전반부에 끼입니다. 그가 작품을 완성하는 순서를 간략히 말해보면, 먼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큰 틀을 구상한다고 합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장소를 찾아다니는 일이 다음 차례입니다. 로케이션을 위한 의도적인 탐색도 하지만, 우연히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기도 한답니다. 작가 머릿속에 작품을 위한 방이 하나만 마련되어있진 않겠지요. 공간을 찾았다면 거기에 이야기를 실현할 구도와 색상의 스케치가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필요한 인물 섭외를 하고, 그들 지원자와 충분한 대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용인지 추정해보면요. 첫째, 프레임 속에서 각자 뭘 할 건지 깨닫고, 결과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덜 지루하고 덜 피곤하겠죠. 둘째로 촬영이 시스템 속에서 한낱 부속품처럼 끼워 맞춰진 처지를 재현하는 과정이며, 모델들을 소모품처럼 대하지 않을 거란 언약이기도 합니다. 대화는 셋째로 또래 집단에 관한 인터뷰가 되어 본 작업과 다음 작업의 아이디어를 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스튜디오가 아닌 바깥에서 벌어지는 작업인 만큼, 촬영은 영화적인 특성을 가집니다. 또 필름 카메라를 써서 정지된 상을 잡아내므로 후보정 작업이 들어갈 여지는 매우 좁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가 되는 현장 통제입니다. 근경이 아니라 대지 경관을 잡아야 하는 작업에서 작가가 인물들의 위치와 동작을 통제하기 위해선 사전 준비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화 조연출자가 엑스트라들 사이에서 현장 지시하듯, 모델들 가운데 그 역할을 맡은 스태프가 있을 겁니다. 텅 빈 도시를 보여 주는 사진은 사람 통제가 힘듭니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불청객은 후반 작업으로 솎아내어야 하겠죠. 이처럼 깨알 같은 설정이 들어간 탓에, 사진 인화는 관람자를 위하여 크게 뽑는 판본이 필요합니다. 모든 과정의 결합을 통해 그의 사진은 크게 세 가지 외적 요소를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로 로케이션 장소, 둘째로 대지미술로써 연출한 인스톨레이션, 셋째로 인물의 위치와 의상과 동작 지시입니다.
저는 송석우의 작업이 비평이나 해석과 별개로, 도록과 같은 형태의 작가 코멘터리가 있더라도 재미있을 거라 봅니다. 하나의 작품 배후에 놓인 육하원칙의 사실, 여기에 순간적인 그곳만의 공기는 사진 표현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송석우 작가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제4의 벽>이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벽은 깨트리는 행위를 전제한 존재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4의 벽은 창작물과 감상자 사이에 놓인 인식의 벽입니다. 어떤 서사물은 이 벽을 깨고 주인공이 독자에게 느닷없이 말을 거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지 디드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우디 앨런, 조 단테, 그리고 마블의 스탠 리 같은 작가들이 세워둔 제4의 벽 깨기는 사진에서 실현하기에 쉽지 않은 프로젝트입니다. 관람자는 사진 구도 안에서 벽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그게 벽이 부자연스러운 설정의 가상계와 원래부터 그럴듯하게 존재하는 실제계의 중첩이라고 봅니다. 사실을 찍었음에도 환상을 보는 인지가 관객의 전면 시야 180도 앞에 공개됩니다. 단수 높은 관객은 카메라 이면의 180도 반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합니다.
사진은 뒤편에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을 제쳐두고 렌즈 앞으로 초점을 맞춥니다. 그곳은 정제되고 단순하게 제시됩니다. 작가가 그곳을 사진 대신 말로 설명하려면, 삼인칭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건 이름과 얼굴 없이, 윤곽만 알 수 있는 대상화된 존재란 뜻입니다. 취업률과 실업률,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 정책 찬성과 반대 비율로 객관화된 사람들의 상태는 다양한 국면에서 드러나지 않은 성정을 품고 있습니다. 송석우 작가는 일인칭 시점에서 풀어놓을 개인사를 삼인칭의 사회적 사실로 포개어 놓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사회학 전공자인 제가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행위와 구조의 상호보완 관계, 세대갈등론, 개성의 말살과 그 반대 격인 예술가의 자아도취, 이 모든 이야기에 입을 떼는 게 그의 사진에서 가능합니다. 이 작업이 열띤 토론 주제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렇긴 해도 그런 불판은 우선 작품이 가진 비현실과 현실의 왕래가 실현한 아름다움부터 충분히 감상한 다음의 일이겠지요.